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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등대복지회와 함께 한 북한 방문기
작성일 2009-06-29 10:09:55 조회 2960
글쓴이 김득렬 원로목사 (디트로이트 한인연합장로교회) 방북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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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나는 2008년 5월 22일부터 6월 3일까지,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며, 5월 27일 지프를 타고, 흰 눈에 쌓인 우리 겨레의 영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갔다. 마음에 그리던 천지(天池)를 굽어보며 흰 눈에 덮인 대 설원 북한 땅을 전망하고, 내가 자란 고향 신천에 한번 가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품었다. 그런데 1999년부터 북한 여러 곳에서, 인도주의적 구호사역으로 선교하는 미국장로교(PCUSA) 서울주재 Kinsler 선교사 내외가 2004년 5월부터는 통일부 산하 비영리단체 ‘등대복지회’를 설립하고, 후원자를 대동(帶同)하여 방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방북을 신청하였다.  

 

드디어 2009년 4월 18일~25일, 7박 8일간의 방북, 신천에도 갈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4월 8일 북한이 인공위성(또는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여 전 세계는 큰 충격에 빠지고 초긴장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신영순 선교사님께 전화로 형편을 타진하였더니, 북한 내부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하고, 우리 일행들의 북한입국 비자도 나와 있으므로,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한다. 가능하면 북한 고아원 아동들에게 도움이 되는 약품을 갖다 줄 수 있었으면 하고 요청하시기에, 소아과 전문의인 디트로이트 한인연합장로교회 선교부 최은숙 장로님께 연락을 드렸다.  

 

가까운 가족들과 친지 중에는 꼭 이런 때에 갈 것 없지 않으냐고 은근히 말리는 이가 생겼고, 방북하는 그 기간에 매일 특별 새벽기도회로 모여 기도로 돕겠다고 격려하는 이도 생겼다. 교회 선교부의 광고에 호응하여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비타민, 항생제, 연고 등등 약품들이 수북이 수집되었다. 그 약품들을 두 개의 큰 가방에 나누고, 하나를 이번 방북에 동행하시는 김응률 목사님께 왕복 7시간을 운전해가서 부탁드리고 왔다.

 

4월 18일 오후 1시, 우리 일행(김득렬 목사, 김응률 목사, 원미나 권사, 이정임 권사, 이태실 집사, 가나다 순) 5인은 중국 심양 비행장 대합실에서 첫 회합을 가졌고, 오후 3시에 고려항공 편으로 평양에 갔다. 인솔하시는 등대복지회 상임이사 신영순 선교사는 이번 방북이 1999년부터 시작해서 벌써 70번째라고 하셔서 우리 모두 놀랐고, 그의 정열적이고 투철한 북한 선교의 사명의식이 박력 있게 다가왔다.   

 

그가 그렇게 북한선교에 몰입한 것은 그의 시아버지인 전설적인 미국장로교 선교사 권세열 박사(Francis Kinsler)가 1928년 10월 4일, 25세의 총각선교사로, 평양 숭실대학의 성경과 영문학교수로 부임함에서 그 근원을 둔다. 그는 평양에서 1930년 결혼하고,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평양을 떠날 때까지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남녀 고등성경학교에서 교수하며, 미취학 청소년 교육운동인 성경구락부 운동을 독창적으로 창설하여 허다한 결실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인 ‘등대복지회’ 이사장 권오덕 박사(Arthur Kinsler)는 평양에서 출생하여, 아동기를 평양에서 보낸 평양인이기 때문에 북한선교에 대한 그들의 애착심은 깊고,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찍 봄을 맞이한 서울은 어디나 꽃동산이었는데, 북위 39도의 평양에 와보니 어디나 꽃천지였다. 서울에 피는 꽃, 평양에도 활짝 피었건만, 분단 64년을 맞아야 하는 우리 가슴은 아프고 저렸다.   

 

우리는 평양의 해방산 호텔에 짐을 풀고 방문일정에 들어갔다. 주일에는 봉수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장애인콩우유빵공장과 장애인재활복지시설인 ‘보통강 종합편의’에 가서 장애인 직업훈련 참관을 하고, 장차 건립될 ‘평양장애인종합회복센터’의 3,600평 부지를 찾아가서 손을 마주 잡고 기도드렸다. 황해북도 사리원에 가는 차중에서, 황주(黃州)가 고향이신 김응률 목사님은 고속도로에서 떨어져 있는 고향 산천을 감회 깊게 바라보며 지나올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사리원에 있는 두 곳의 육아원(각각 350명의 아동과 70명의 직원이 있음)을 방문하고 약품들을 전달하였다.  

 

사리원에서 서쪽으로 80리(32km), 황해남도 신천(信川). 꿈에도 보고 싶던 내가 성장한 고향에 잠시 들릴 수 있었다. 길은 옛날 그 길, 그 위에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의 자동차는 쏜살같이 신천읍에 있는 ‘신천박물관‘ 안에 들어섰다.  김병조 관장의 설명을 듣고 현 위치가 어디쯤이냐고 물었더니, 옛날 신천경찰서 뒤쯤이라고 한다. 언제나 마음속에 그려오던 신천. 내가 졸업한 경신학교, 내 아버지가 시무하신 서부교회... 이전(以前) 신천의 모든 구조물은 6.25 전쟁으로 사라졌고, 그 위에 전혀 새로운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

 

1946년 내가 신천을 떠날 때에 있던 것으로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신천에서 신천 온천으로 걸어 다니던 구부러진 신작로(新作路)와, 그 좌측에 보이는 작은 야산 ‘돈진산’ 뿐이었다. 나는 차를 멈추게 하고, 그 길 위에서 몇 발짝 걷기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다음날은 원산(元山)에 있는 농아(聾兒)학교를 방문하여 미용 및 리발, 봉재, 컴퓨터 등의 교육과정을 참관하고, 콩우유공장도 견학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과 보현사를 방문하였다.

 

우리 일행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로 서로 격려하며,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들을 각자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먼저 금번 우리들의 북한선교방문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여 ‘유종의 미’를 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피곤을 모르는 열정으로 우리들의 방북 여행을 인도하고, 마땅히 해야 할 북한선교의 과제들을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신 신영순 선교사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