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다이어리

등대 스토리

등대 스토리등대복지회는 지구촌 이웃이 함께 잘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곳에 사랑과 희망의 빛을 비추고자 합니다.

심장 속에 남을 그 땅, 그 사람들...

작성자
lighthouse
작성일
2019-05-09 17:28
조회
3304
작성자: 조일 사무국장
작성일: 2006-11-10

오월의 신록이 푸르름을 더해가던 봄의 한 가운데였다.
수년 동안 머리 속으로만 그려오던 평양 땅을 밟은 것이다.
“조일 선생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고 한방을 예약했지 뭡네까!”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북측 한 관계자의 농담이 처음 만난 서먹함과 긴장감을 웃음으로 희석시켜 주었다.
구릿빛 얼굴 위로 번지는 환한 미소, 북쪽 특유의 말씨가 조금은 낯설었지만 정겹게 느껴졌다.

이렇게 만날 것을……
기나긴 기다림 속에 안타까워하면서 희망의 빛이 바랠 즈음, 어렵사리 문이 열린 것이다.
나에겐 의미 있는, 특별한 방문이었다.
대북사업에 동참하여 실무자로서 일해온 지 8년째, 내가 속한 단체의 북쪽 창구가 외국 또는
교포 상대기관이라는 이유로, 남한인 신분의 나에겐 북쪽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렵잖게 북으로 향해 갈 때도 영상으로만 사진으로만, 혹은 문서로만 접하던 그 땅, 그 사람들이었다.

눈에 익은 거리,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
무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그 동안 듣고 보아 왔던 것들을 확인하는 기회이리라 여겼다.
약간의 기대와 설렘은 있었지만 서울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덤덤하던 가슴이 평양에 머무는
하루, 이틀…조금씩 요동치고 있었다. 평양시내를 돌며 사업장을 방문하고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일주일간의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그들의 모습에 내심 놀라워하면서.

등대복지회가 지원하고 있는 대동강구역 ‘평화빵우유공장’을 방문하여 콩우유와 갓 구워진 빵을
직접 맛보면서, 어떤 물품이 더 필요한지 묻는 물음에, 50가까운 나이의 리영희 관리위원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어도 미안해서 더 이상 요구를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작은 나눔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후원자 한 분, 한 분께 전할 수 있을까…
섬김의 행복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혁명과 구호와 이념만 난무하리라 예상했던 북녘 땅에도 순수한 사랑과 눈물, 정과 웃음이 있었다.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 속에 아직 함께 할 수 없는 부분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낄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이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듯 암울하고 혼란한 날들의 연속일지라도
언젠가 새벽처럼 찾아 올 희망의 날을 기다리는 까닭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웃고 노래하며 기도하고 대화하면서
서로의 감정이 전해지는 순간 순간, 한 울타리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원할 수 없는 분단의 슬픔, 끝이 있는 이별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리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대도, 헤어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북녘의 애절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심장 속에 남아 오랫동안 기억될 북의 형제 자매들을 그리며, 나의 오늘을 되돌아 본다.
상대적인 풍요로움 속에서도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종종 일탈을 꿈꾸어 왔던 나의 평범한 하루 하루가
말할 수 없는 축복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며, 그들도 언젠가 우리와 같은 평범함으로 마주할 날을 꿈꾼다.

긴장 속에 시작된 7박 8일의 일정이 아쉬움 속에 끝을 맺고, 따뜻한 봄 햇살이 눈부신 정오,
기약 없이 평양을 떠나면서 간절히 기원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야 마는 봄처럼,
언젠가는 그렇게 맞으리라.
하나된 조국에서 찬란한 부활의 봄을.

2006년 5월
등대복지회 사무국장 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