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다이어리

등대 스토리

등대 스토리등대복지회는 지구촌 이웃이 함께 잘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곳에 사랑과 희망의 빛을 비추고자 합니다.

평양의 겨울 속, 따뜻함을 남기고 왔습니다.

작성자
lighthouse
작성일
2019-05-10 09:20
조회
4929
작성자: 조일 사무국장
작성일: 2010-07-08


평양엔 이미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북경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오른 방북길,
순안공항에 들어서자 매서운 바람이 먼저 대표단을 맞았다.
“못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왔습네까? 아무튼, 반갑습니다.” 기대치 않은 방문에
다소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북측 관계자들은 반가운 얼굴로 우리 일행을 환영했다.
지난 9월에도 쉽지 않은 평양 길이었는데, 11월 방문은 올 들어 남한인들의 방문이 뜸한데다
서해교전 이후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진 남한 민간단체의 첫 방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11월 17일부터 21일까지, 가을의 끝자락에서 바짝 다가선 겨울을 느끼며
남한대표단으로서는 금년 마지막 방문이 될 4박 5일의 일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애인 자립자활센터인 ‘보통강 종합편의’의 감색 목재 현관문이 열리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반기는 낯익은 미소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이름이 뭡니까? 직업은?...“

장애인사업을 시작한 이래 북녘 사업장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남과 북 수화의 통일이다.
일행 중 김정열 교수와 봉제실, 이발실의 농아 봉사자들이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 남과 북의 수화가 다르다고 알고 있었기에 간단하게나마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반갑기도 했지만,
방문할 때마다 마주치는 농아 봉사자들과 눈인사만으로 끝날 뻔했던 만남이 직접적인 대화로 이어지던 순간,
통일이 또 한걸음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옴을 느꼈기 때문이다.


* 보통강 종합편의

‘가슴둘레 14, 팔 기장 28, 허리 32...상의는 양 트임, 바지통은 좁게...’

양복점 유리창을 통해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을 등에 업고 양복을 맞추기 위해 북측 재단사에게
몸을 맡기고 서 있는 남쪽 일행들, 미소 띤 얼굴로 치수를 부르고 받아 적으며 신이 난 북측 기술자들...
이제는 등대복지회 방문단의 필수코스가 되어 버린 이곳에서 일행 중 몇 분이 양복을 맞추기 위해
옷감을 고르고 재단하며 북측 봉사자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무척 일상적이고도 평화로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남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보통강종합편의산 ‘조선옷’표 양복을 입고 강단에 서서
북한사역에 대해 설교를 하시겠다며 벌써부터 들떠 계시는 목사님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밝고 희망차게 들려온다. 이발실, 미용실, 도장실 등 봉사자들도
갑자기 들이닥친 남측 손님들로 분주해진 분위기가 싫지 않은 표정이다.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지원하지 못한 관계로 예전보다 이용 손님이 줄어들긴 했지만,
이들에겐 일할 수 있는 장소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내년에는 이 센터의 운영이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하며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대동강장애자문화센터

문화센터의 입구에 들어서자 가지런히 정돈된 실내화와 사물함, 탁구대, 소형 악기류 등 등대복지회에서
지원한 설비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야외에 설치한 농구대는 차로로 공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보호망을 설치하지 못해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현재로서는 지원이 어렵다는 안타까운 마음만 전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지난 9월 방문 시에는 이곳에서 지역대항 탁구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는 농아 체육인들을 접할 수 있었다.

‘11월 25일 중구역:대동강구역, 12월 2일 평천구역:모란봉구역, 12월 9일 서성구역:대성구역...’

한쪽 벽면에 걸린 칠판의 대진표가 임박한 경기일정을 알려주고 있다.
이 센터가 예체능 활동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놀라운 체험의 현장이 되기를,
그리고 2012년 개최예정인 런던 장애인올림픽에 최초로 몇 종목만이라도 참가하고 싶다는
이들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 김만유병원 회복치료과

등대복지회에서 2006년부터 장애인 및 일반인 재활환자들의 치료와 훈련을 돕기 위해
각종 장비와 보장구를 지원한 곳이다. 대표단이 이곳을 찾았을 때, 각종 재활장비로 운동 중인
여러 환자와 함께 담당 의사들과 물리치료사들도 만나 볼 수 있었다.

“이 장비는 성능이 좋아 중국과 동유럽에서는 사용료를 받을 정도로 우수한 기계란 말입니다.
유용하게 잘 쓰고 있는데 이용 환자들이 많다 보니 몇 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담당 의사의 입에서, 등대복지회에서 지원한 재활장비의 우수성과 내구성을 연신 칭찬하며
훈련 효과에 대해 설명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우리 측 질문에,
“훈련실 바닥깔개와 뇌졸중 환자를 위한 보장구, 재활치료 관련 책자가 있으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남조선 책자라도 일없습니다.” 친절한 몸짓으로 장비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설명하는
병원 실무진들의 모습에서 환자를 위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이들 앞에서 누가 남과 북의 거리, 사상과 이념을 논할 수 있으랴!


* 평화빵우유공장

이 공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우리네 어느 소박한 시골길을 연상케 한다.
구불구불 차 한 대가 겨우 지날만한 좁다란 골목길을 들어서면, 하늘하늘 피어난 코스모스와
북녘 여인네들을 닮은 수수한 들꽃들이 계절 따라 우리를 반겼다. 11월 19일, 방문 사흘째,
겨울바람에 꽃은 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줄지어 선 길을 따라 입구로 들어서니
커다란 붉은 글씨의 구호들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이 북쪽이구나!’ 실감하는 것도 잠시,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하는 공장 직원들을 만나면 남과 북 가를 겨를도 없이 어느새 웃음꽃이 만발한다.

급식재료가 채 도착하지 않아 지난 방문 시,
창고에 가득하게 쌓여 있던 밀가루, 설탕, 식용유 등 식재료들은 거의 바닥을 보였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재료로 구워놓은 빵과 과자들이 분배지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공장을 지속적으로 후원해 온 광주벧엘교회 김창식 교수님과 박상헌 집사님께서 이번 방문에
동행하셔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었다. 콩우유를 맛보고 제빵기계에 부착된 ‘광주벧엘교회’ 명판을 확인하며
공장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면서 두 분은 지원현장을 직접 방문한 감회가 남다른 듯 했다.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고비를 맞았을 때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전해 온 남측 후원자의 진심을 알고
공장 관계자들이 감사의 뜻을 표하는 따뜻한 만남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남북을 잇는 아름다운 나눔의 손길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기를 희망했다.



* 사리원콩우유빵공장

이 곳은 제빵기술은 물론, 지방 견학생들에 대한 실습과 교육도 실시하는 등 지역 내 손색없는 모범공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부족한 재료로도 부드럽게 구워진 모닝 빵과 타원형 모양의 햄버거용 빵을 맛보며 속을 채울 부가재료를
보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재료만 충분하면 더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며
격려와 위로를 건네고 싶지만, 빵을 구우며 마냥 행복해 하는 봉사자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이러한 미안함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 황해북도육아원분원

‘이 것좀 먹어 보시라요!’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간식 시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님들에게 들고 있던
빵을 건네는 아이들...충분한 간식거리를 제공받지 못하는 아이들이기에 욕심스런 마음이 생길 법도 하건만
빵을 권하는 해맑은 얼굴엔 전혀 거리낌이 없다. 겨울나기용으로 준비한 담요와 내의가 속히 도착하여
아이들의 몸을 곧 엄습해 올 냉기를 조금이나마 막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특수학교

급식시설 위생환경 개선을 계획했던 지방 특수학교들에는 물자반출의 어려움으로
기본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는데 그쳤다. 다행히 일부 특수학교는 국제기구에서 관심을 가지고 학용품, 교육기자재 등을
지원하기는 했지만,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등대복지회의 지원으로 북한 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농촌에 있던 특수학교들이 점점 도시로 이동해 오고 있다는 북측 관계자의 말을 듣고
짧은 시간 동안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음에 보람을 느끼며, 우리의 지원에 협력하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북 장애자보호련맹의 노력이 고마웠다.

‘장애인사업만은 인도주의로, 다른 건 못해도 이건 해야겠다. 또 힘들기 때문에 이 사업을 더 잘해야겠다.’라는
북측 관계자의 바램이 곧 우리의 바램임을 알기에,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 남측의 후원자들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방북 에필로그....


올 한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특히, 남북관계에 있어 연이어 가슴 졸이게 했던 크고 작은 마찰들,
인도적 지원마저 단절될 위기에 처했지만 함께 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답답하고 암울한 가운데 한 해의 터널을
막 벗어나고 있는 우리 앞에 또 다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찾는 자의 몫, 참된 평화를 위해 견뎌내야 할 시련이라면 기꺼이 감내하리라.

4박 5일간의 짧은 여행은 끝을 맺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남과 북을 하나로 잇는 우리의 긴 여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됨을 위한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는 그날까지.
같은 하늘 아래 하나의 소망되어 만날 그날까지.